부스러기에도 소망이 있다 (마가복음 7장 24~30절)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지식은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바였고, 그가 쓴 책들은 지금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 종교도 문화 현상의 한 부분으로 정의했던 그가 복음 앞에 돌아와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어령 씨가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된 것은, 사랑하는 딸에게 닥친 시련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민아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LA 지방 검사로 교민사회에서는 성공한 인물로 부러움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상선 암에 걸려 모든 것을 잃게 되고, 그녀의 작은 아들은 특수 자폐아판정을 받게 됩니다.
이런 딸의 모습을 가슴 아파하던 이어령 씨가 딸을 한국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딸과 손자를 위해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토록 고고하던 지성, 성경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진리로 믿지 못했던 그가, 사랑하는 딸에게 닥친 고난 때문에 무릎 꿇고 기도하다가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밤하늘이 어두워야 별을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난과 시련은 그 자체는 반가운 것이 아니지만, 소망의 주님이 더 크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의 발아래 엎드려 간구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처럼 환영받지 못합니다. 27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 예수님은 유대인을 ‘자녀’로 표현하고, 이 여인을 ‘개’로 표현하십니다. 사람이 가장 참기 힘든 것이, 남에게 무시 받고, 자존심이 짓밟힐 때가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이방 여인을 특별히 비하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서는 ‘마귀의 자식’이라 하셨고, 바리새인들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진노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이방 여인만을 차별해서 말씀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의 초라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들추어 낸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유대인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 분노해서 예수님을 죽였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에 조금도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여자들 같으면 감정을 이길 수 없어 예수님의 멱살이라도 잡고 달려들었겠지만, 이 여인은 더욱 매달립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비록 부스러기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손에 들려 있을 때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이 여인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자존심만 내세우면서, 하나님 은혜와 상관없이 살지는 않습니까? - 정구윤 목사
댓글0개